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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소개서 작성의 실제 사례[일반사무직-2]
안녕하십니까!
귀사에 입사를 희망하는 ooo 인사 드립니다.
이렇게 만나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그럼 자기소개를 드리겠습니다.
※ 과거를 돌아 본 시간들
Wharton GIS Lab, 그간 일년 넘게 사용해온 제 혼자만의 방, 누에고치, 오늘밤이 마지막입니다. 새벽 3시 반이 지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연구소 책임자에게 프로젝트와 데이터를 넘기기 전에 CD를 복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제 삶이 또 한번 대나무 매듭처럼 한 구비 넘어 가는군요. 감회가 남다릅니다. 조금전 친구랑 제 사무실 옆 뜨락의 계단에 서서 담배를 같이 피웠습니다. ■■바로 이 자리가 너랑 나랑 GIS로 어떻게 돈을 벌지‘ 하며 세시간 넘게 토론한 자리다, 그지?■■ ■■무슨 성지순례처럼 말하네?■■ ■■……■■
만나기도 전에, 사람들을 믿을 수 있다는 사실이 저를 행복하게 만들어줍니다. 의심과 신중함 그리고 긴장이 아닌 설레임, 따뜻함, 기대감을 가지고 회사의 문을 두드리겠습니다. 우리를 앞서간 세대들이 만들어 놓은 수많은 조언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친한 친구끼리 사업하지 마라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 말입니다. 제가 몸소 건너가기 전에 그런 말을 그대로 다 믿지는 않을 작정입니다. 다만 제가 작은 이익과 눈앞의 이해관계에 추해지지 않기를 절실하게 기도합니다. 전 손해만 보고 살 정도로 너그럽거나 순진한 사람은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손해를 봐야할 때가 언제인지는 알고 싶습니다. 때론 손해를 보더라도 좋은 사람을 얻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판단력이 제게 있기를 정말 기대합니다.
사실, 제가 돈을 벌어야겠다는 마음을 정한 것은 지난 여름 한국을 다녀오면서 입니다. 제 인생에 최초로 ■■아, 돈을 좀 벌어야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으로 돈을 벌지? 고민하다가 제가 가진 별거 아닌 가능성을 꼼꼼히 따져 보았습니다. 작은 손재주, 세상의 흐름을 보려고 애쓰는 눈, 무엇보다 중요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 그들과 함께해온, 기대고 받쳐주고 하는 자세 뭐 이 정도가 제가 내세울 수 있는 것들입니다.
멀리 멀리 돌아온 길
비지니스맨으로 보면, 너무너무 돌아온 삶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 친구말대로 그게 돌고 돌아온 외딴길이 아니라 어쩌면 가장 빠르거나 꼭 필요했던 절차가 아니었을까 믿고 싶습니다. 저의 오래된 이야깃거리 하나 있습니다. 의정부에서 본징역을 살 때입니다. 10월 말, 한낮 운동시간, 작은 운동장을 다람쥐처럼 빙빙 돌며 뛰기도 하고 산책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담장과 담장이 서로 만나는 곳, 하루 종일 햇볕이 찾아들 수 없는 그 사각지역에 민들레가 피었습니다.
10월의 민들레라. 봄에 건강하게 피어나는 우량아들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의 애처로운 체구를 한 작은 민들레였습니다. 그 민들레가 햇볕 없이 봄, 여름, 가을을 통째로 기다려, 땅에서 올라오는 지열만 가지고 끝내 꽃으로 피는 것을 보고 얼마나 강렬한 충격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김지하 시인이 철창의 풀 씨를 보고 생명에 대해 새로운 눈을 떴다는 것 이상의 충격을 받은 거죠. 봄에 이미 꽃으로 피어난 민들레들에 비해, 10월의 민들레를 6개월 지각, 열등, 꼴찌 이런 단어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겁니다. 저는 6개월이나 뒤쳐져 겨우 피어난 사실을 번복할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10월의 민들레 자신에게 6개월의 세월은 그 자체로 너무나 의미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늦게 피었을지라도 가장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어두운 과거에서 무너져 내린 것들
최근 가까운 몇 선배 동료들에게 귀국 인사를 미리 이메일이나 전화로 알렸습니다. 한 선배가 그럽니다. '정치할 놈이 사업은 무슨 사업이야, 야, 웃기지마' 그럽니다. 어떤 선배는 아주 진지하게 검토해보라는 말까지 했습니다. 한국을 떠나올 때까지의 제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분들 눈에는 정말 그렇게도 보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90년, 당시로서도 저에게 너무 과분했던 한 대학의 학생회를 일년동안 대표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해에는 전대협의 중앙집행부로 일하게 되었고 구속되어 2년 동안 감옥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학생운동을 할 때, 정말 쑥쓰럽게도 제 꿈은 직업 혁명가 되어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91년에 붙잡혀 안기부에서 조사를 받았습니다. 수사팀이 꾸려지는 짧은 시간, 한 안기부 직원이 ■■야, 학생운동 하는 놈들이 어디 한 두 놈이냐, 그래도 안기부에까지 와서 조사를 받는 놈들은 영광으로 생각해야 돼■■ 그랬습니다. 하지만 저의 조사기간은 영광은커녕 아주 비참하고 처참한 것이었습니다. 직업 혁명가를 꿈꾼 사람의 내공치고는 참 무참하게도 무너져 내렸습니다. 안기부에서 수배 중이던 친구가 숨어있던 자취방을 결국 3일만에 제 손으로 꼼꼼한 약도로 그려 주었습니다. 21일간의 수사에서 저는 만방으로 깨지고 완전히 K.O패 당했습니다. 정말 주저리 주저리 다 불었고 원하는 건 다 진술서에 써주었습니다. 모나미 볼펜 12자루, 그렇게나 많은 분량을 써주고 말았습니다.
그 죄책감, 자신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을 극복하는 데 꼬박 1년 반이 걸렸습니다. 제 스스로가 너무 싫어서 20대 저를 움직여온 모든 단어들을 근본부터 의심하기 시작해서 백지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저를 위한, 저에 의한, 저의 새로운 사전을 쓰기로 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자신만을 위해 영어 단어장이나 수학공식 노트를 만들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단어와 개념 하나하나 제 생각으로, 무엇보다 제가 솔직히 감당할 수 있는 것인지를 가장 중요한 잣대로 삼았습니다. 남들이 알아주길 바라고, 남들을 설득할 그런 여력이 없었습니다. 제가 우선 숨을 쉬고 살아야겠기에 저 스스로를 위해 제 머리, 제 마음, 제 몸뚱이로 정리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직업 운동가의 꿈을 버렸습니다. 3년만에 내팽겨칠 수 있던 약해 빠진 꿈이었습니다. 무슨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제가 원하는 시스템을 만드는데 기여하겠다는 방법론도 버렸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선거를 통한 평화적인 권력수립이었고, 그 당시 그나마 제도 정치권이 그 길을 여는 데 가장 중요하고 빠른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에서 보낸 4년
출소 후에,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제가 지금도 너무 좋아하는 한 선배가 일자리 하나를 제안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상의해보고 의견도 구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민주당 소속 재야출신 국회의원들이 만든 ■■민주개혁정치모임■■의 정책실에서 사회활동을 시작해 국회의원 김근태 의원실을 그만둘 때까지 대략 3년반 그리고 유학갈 학교가 결정되고 출국 직전까지 선배들을 도와 ■■젊은한국■■이 탄생하는 것도 보고 떠나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역시 제 마지막 모습은 ■■여의도 정치권■■에서 쉼표로 끝나 있었습니다. 20-30대를 전담하는 기획팀으로 조순 서울시장 선거를 그리고 가끔 마이크도 직접 잡고 김근태 의원 총선도 치뤘습니다. 그때는 참 신나있었습니다. 그런데, 점점 여의도 생활이 재미없어지기 시작해졌습니다. 당시 학생운동 출신 선배들의 정치적 성공을 보면서 좀 강하게 자극을 받고, 야망이 땡기고, 정말 열심히 노력해도 될까 말까 한데, 제 마음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누구 말대로 놀맨놀맨 하고 살려면 끝도 없이 폼잡고 살 수 있고, 제대로 일을 하려면 한도 끝도 없이 많은 일을 보람 있게 할 수 있는 자리가 정치인의 자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금도 제 마음에 너무나 근사한 국회의원, 보좌관, 비서들, 당직자들이 많습니다. 그 분들을 생각하면 희망도 느끼고 든든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정치 그 자체가 아니라 제 자신이었습니다. ○○○ 정치권에 있을 때, 제일 힘들었던 건 '너도 나중에 그 잘난 국회의원 하고싶냐'하는 그런 비아냥이 아니였습니다. 택시를 타고 국회의사당 안으로 들어오는 데 40대초반의 기사아저씨가 '(매우 공격적인 목소리로) 아저씨, 여기서 일해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네……' 택시기사 아저씨가 저를 세상에서 제일 한심한 놈으로 쳐다보며 정말 재수없다는 표정을 짓는 거에요. 그런 저런 일로 계속 맘이 상하고 스스로 상처받고, 난 왜 이렇게 여기가 점점 재미없지 할 때마다, 의사당에서 가까운 한강에 나가 담배도 피고, 한숨도 쉬고 그랬습니다.
그러다,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국회의원들의 하루하루 꽉찬 일정, 자기가 하고 싶은 것보다는 해야만 하는 당위로 가득찬 삶, 남들의 이목을 언제나 의식하며 살아야 하는 공개되고 추적 받는 일상, 싫어도 싫다 대놓고 표현 못 하는 포카페이스도 잘해야 하고, 때론 나 잘났다고 계속 설득해야 되고 내가 대안이라고 계속 말해야 하는 것, 이런 것들이 점점 감당하기 힘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정치권에서 20년이 지나면 오늘 나의 정체성이 유지될까, 오늘의 내가 다 해체되고 지금으로서는 너무 낯선 내가 20년 후에 만들어지지 않을까, 그것이 너무 무서워졌습니다. 물론 이런 고민이 비단 정치권에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20대 4년을 한 분야에서 열심히 뛰었다지만 그 분야에 평생을 걸지 말지 결정하지 못하는 주저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한달 휴가를 내 정말 열심히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유학을 준비하려고 중학생 수준에서 영어공부를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첫 토플모의시험 성적은 차마 다음 발걸음을 떼기 고통스러울 정도였습니다.
단 한 사람을 위한 GIS 특강
돌이켜보면 미국에서 보냈던 나날들이 전 참 좋았습니다. 새로운 기술, 새로운 취미, 첫아이, 새 친구들을 얻었습니다. 제 자신 속에 이런 것들이 있었나 새삼스런 발견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99년 첫 학기는 울고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일단은 수업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거의 백지에 가까운 답안지를 낸 적도 있습니다. 대학원생에게 주어지는 최하점이 성적표에 찍혀있기도 했습니다. 걸음마다 고난의 행군이었습니다. ■■10월의 민들레■■ 때문에 시작한 환경정책 공부는 일년이 지나며 심각한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일단 정책은 말과 글로 사람들을 설득해야만 하는 분야입니다. 우리말은 모르겠지만 영어로 말하고 글을 써 상대의 동의를 끌어내야 하는 막막함은 쉽게 극복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고민은 언어장벽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제 가슴이었습니다. 환경정책 중요하다. 누군가는 해야 한다. 운동의 연장선에서 내가 택할 수 있는 새로운 분야라는 얄팍한 당위의식이 한계에 부딪힌 것입니다. 박사과정에 진학하고 싶은 욕심도 버리지 못하고 공부는 별다른 진전이 없던 여름방학이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점심을 먹고 교정이 훤히 내다보이는 나무벤치에 앉아 지금은 연대 도시공학부 교수로 있는 친구와 우연히 GIS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GIS로 하버드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박사학위 논문도 GIS의 공간분석 기법을 사용하고 있던 최고 전문가였습니다. 그는 아주 기본적인 개념을 중심으로 설명했고,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저로서는 엉뚱한 질문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더니 그 친구가 혹시 볼펜하고 종이가 있냐고 물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가 이끄는 대로 빈 강의실로 들어갔습니다. 저는 질문을 계속했고 그 친구는 두 시간 가까이 칠판에 분필로 개념이면 개념, 실제 사례면 사례 차근차근 설명해주기 시작했습니다. 청강생 단 한 명을 위한 GIS 특강이 열띠게 진행된 것입니다. 그래서 다가오는 가을 학기에는 꼭 세계적인 GIS 거장 데이나 탐린 교수가 가르치는 강의를 듣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 강의, 단 한명의 친구를 위한 두 시간짜리 강의가 오늘 저에게 이토록 영향을 미치게 될지 저는 정말 몰랐습니다.
일년 반만에 들은 첫 칭찬
한박사의 조언대로 새학기가 오기 전까지 책 한 권을 달달달 외우지는 못했지만 열심히 읽고 이런 저런 상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천자문 하늘천따지를 시작한 것입니다. 수업이 시작되었고 12주, 매주 숙제가 주어졌습니다. 막힐 때마다 한박사에게 많은 구원요청을 원했지만 그는 의도적으로 저 스스로 읽고 고민하게 이끌어 주었습니다. 처음 셋째주까지 저는 겨우 반 평균점수를 받는데 급급했습니다. 이미 일주일에 그 과목에 쏟아 붓는 시간이 스무 시간 서른 시간이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점수가 문제가 아니라 제가 재미를 붙이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버벅대는 영어를 길게 늘어놓을 필요가 우선 없었습니다. 창의적인 생각이 담긴 지도를 만들거나 제가 어떻게 그 결과값에 도달했는지 작업의 과정을 간단히 설명하면 되었습니다. 언어문제도 줄어들고, 재미도 있었고, 눈을 사로잡는 점, 선, 면, 이미지, 색깔들이 점점 더 빠져들게 만들었습니다.
넷째주부터 반에서 중간 이상 점수를 받기 시작해서, 마지막 숙제는 제일 재미있게 마무리했습니다. 작은 도시의 개발정책을 분석하는 기본테마에 저는 미국 공화당, 민주당, 녹색당의 선거전을 가장 시나리오로 짜서 GIS로 분석해서 제출했습니다. 괜찮은 성적이 나올 수도 있다는 은근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적표에 찍힌 점수는 저를 상당히 놀래키는 것이었습니다. 미국 대학에서 학점 A와 A+는 점수 차이는 없는 일종의 명예 점수입니다. 미국에 온지 일년 반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커다란 칭찬을 받은 기분이었습니다. 후진 영어 구사력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이 교수는 제가 엉덩이로 들인 시간과 관련서적을 뒤지고 남들이 하지 않은 재미있는 스토리를 집어넣은 몇 개의 숙제에 과분한 격려성 점수를 준 것 같습니다. 그날은 정말 누구라도 붙들고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GIS 중독증후군
GIS에 맛이 들린 네번째 학기는 논문학기였습니다. 한박사가 조교로 가르치는 GIS 스튜디오 수업을 신청해서 한박사의 코치대로 수업을 들으며 논문을 동시에 쓰는 지혜를 배우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이메일 한통이 데이나 탐린 교수로부터 날아 왔습니다. 그 교수가 소장으로 책임을 맡고 있는 벤처GIS 연구소에 연구원 자리가 하나 났으니 관심있으면 인사책임자를 만나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메일 주소를 확인해보니 여섯명이 전부였습니다. 경쟁률 6대 1, 해볼만 하다고 생각해서 신속하게 움직였습니다. 인사책임자와 약속을 잡고 이력서와 지난 학기에 작업한 내용들을 정리해서 찾아갔을 때, 그녀는 웃으며 너에 대해서 교수한테 이미 들은 것이 있다며 상당히 친절하게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좋았던 예감대로 CML이란 연구소에서 일년동안 새로운 나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우선 보통 석사과정 학생에게는 없는 자신만의 책상, 공간, 컴퓨터가 주어졌습니다. 당연히 처음에 떨어지는 일은 가장 낮은 수준의 노가다 업무들이 주된 것이었습니다. 저는 제 공간이 생겼다는 사실부터 필라델피아 시청이 수년째 의뢰해온 54만 주택과 빌딩, 각종 도로망, 인구통계, 세금정책, 가스, 수도, 환경정보 등을 하나로 통합한 지리정보시스템에 들어가 가끔은 파일을 망가뜨리는 사고를 치기도 했지만 너무 신나 이른 아침에 연구소에 나와 자정까지 거기서 밥먹고, 책보고, 프로그램 배우고, 선배 연구원을 정말 괴롭히며 묻고, 조금씩 배워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실제 세상에서 돌아가는, 숙제낼 때 상상력으로만 그려보던 것이 아닌, 진짜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꼭 3년 물심부름, 주방 청소를 벗어나 처음으로 요리대에서 음식을 만들게 된 신참 요리사같은 기분이었습니다. 마지막 학기 논문은 루지애나 주정부 관광청이 연구비를 지원한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뉴올리언즈의 문화자원에 영향을 주는 환경요인을 GIS로 분석하는 것으로 마무리지었습니다. 그 마지막 학기에 이르러 주변 박사과 석사과정 학생들이 GIS에 대해, 숙제에 대해, 프로젝트에 대해 물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2년의 짧은 시간 동안, 참으로 많은 일들이 지나갔습니다. 뉴올리언즈 2차 프로젝트에 GIS 전담 연구원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300년된 문화재 천정벽화에 심한 균열이 생겨 전문가들이 참여해서 이를 분석하고 보수하려는 프로젝트는 정말 재미삼아 미국 친구랑 시작했다가 국제 컨퍼런스에 논문을 발표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데이나 탐린 교수의 대학원 수업에 조교를 맡아 미국 친구들을 일주일에 세시간씩 가르치는 경험도 하게 되었습니다. 같은 대학교의 경영대학원 와튼스쿨의 GIS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옮겨 가게 되었고, 하버드대가 진행하고 있는 시카고 주택정책 분석팀에 GIS 컨설턴트로 계약을 맺기도 하고, 와튼스쿨 경영학 박사과정의 친구가 참여한 미국의 한 온라인 쇼핑몰의 공간적 구매패턴 연구에 GIS를 적용하여 크리스마스 이브, 새해 첫날까지 포함된 한달짜리 컴퓨터 작업을 서너 군데 빌딩을 오가며 끝냈을 때에는 둘이 펄쩍펄쩍 뛰기도 했습니다. 그땐 거의 GIS 중독증 정도까지 온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내 종교는 사람
그렇게 내달리면서도 서울의 친구가 방을 마련해준 인터넷 작은 쪽방에 꾸준히 편지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생각도 더 하게 되고, 한국 유학생들과 틈이 나는대로 많은 토론을 하고 배우기도 참 많이 배웠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한국 사회가 잘 보이고 또 이전과 달리 보였습니다. 대학 신입생 시절 시인 한번 되어 보려고 국문과도 가고, 학생운동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재주에 대해 절망하고는 시인이 되려는 생각을 대학교 3학년 때 딱 접었습니다. 그리고 글쓰기에 커다란 두려움을 가지고 있던 제가 요즘에는 다시 아마추어로 저 자신을 위해 글을 씁니다. 저보기 좋으라고요. 그 동안 배운 기술로 돈벌 궁리도 열심히 했고 잘하면 돈도 괜찮게 벌 수 있지 않을까 근거없이 혼자 흐뭇해 하기도 합니다. 운좋게도 전 걸음걸음마다 하나같이 주변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먹고 한걸음 한걸음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정말 영혼이 통하는 친구들을 몇 얻었습니다. 처음에는 차 한잔, 식사자리 한번으로 시작된 관계들입니다. 다음 이야기도 제 친구가 가르쳐준 겁니다. 비틀즈 앨범을 하나하나 들여다 보고는 폴 메카트니와 존 레논이 정말 많은 곡들(거의 7-80% 에 육박)을 공동 창작한 걸 알게 되었습니다. 굉장히 감명 받았습니다.
제가 비틀즈 수준이라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고, 음악을 할 것도 아니고, 문학을 할 것도 아니지만, 그런 느낌이 드는 친구들이 있다면 또 그만한 수준에서 함께 뭔가를 만들어 나가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뉴욕에서 사회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한 시인이 자기가 너무 좋아하는 산책은 하나의 종교같은 거라면서 형 종교는 뭐에요? 그렇게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얼떨결에 내 종교? …… 음…. 사람?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저에게 세상에서 제일 신기한 대상이 바로 사람입니다. 제 삶에서 쓸모있고 뿌듯한 것은 모두 주변 사람들로부터 배웠습니다. 걸음마다 예외인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그것으로 마음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물론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변 사람들에게 많이 안겨주기도 했습니다. 저 안에 그리고 사람들 안에 악마성에서 신성까지 한 몸에 다 들어있습니다. 그걸 보면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합니다.
마르크스는 인간 이성의 힘으로 50점짜리를 100점으로 만들어보겠다고 꿈꾸다 결국 이상주의라는 말을 듣는다고 저는 정리하고 있습니다. 아직 그의 실험이 모두 끝났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성패와 상관없이 그의 꿈은 소중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의 이상이 원안대로 성공할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의 실패는 계몽과 시스템으로 인간의 이기심이 극복되고 연후에 완전한 ■■자유인의 연합■■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에 있다고 봅니다. 사람의 이성을 너무 과대평가했고 동시에 사람의 이기심을 너무 과소평가다고 보는 겁니다. 인간의 이기심을 재는 많은 잣대가 있을 텐데 그 중의 하나가 공동체를 위해 자기 수입의 몇 퍼센트를 세금으로 낼 건지 보는 것은 아주 재미있습니다. 현재 스웨덴 사람들은 75%까지도 괜찮다 하고 미국의 공화당 지지자들은 22% 도 너무 많다고 아우성을 치기도 합니다. 사회적 조건과 개인적 입장에 따라 그 퍼센트는 합의에 의해 바뀔 수 있지만 세금 100% 사회가 올 것이라고 저는 믿지않습니다.
보물섬 지도를 만드는 사람
이제 저는 너무 재미있고 신나고 돈도 될 것 같은 분야를 알게 되었습니다. 제 직업은 이제 지도를 만드는 사람, 지도 아래 숨어있는 이야기를 발굴하는 사람, 피자가게를 하고 싶은 사람에게 어디로 가면 더 많은 고객들을 만날 수 있는지 맟춤형 보물섬 지도를 만들어 보려고 시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벌써 이렇게 마음이 바빠져 버린 저에게 운동을 한다 그만두었다 이런 식의 진술은 별로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저의 몫을 하는 데 게으를 생각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사람들 앞에서 정치적인 이슈에 대해 책임을 지는 자리, ■■나를 따르라■■고 말하기에는 제 삶의 방식과 가치관이 변해버렸다고 솔직히 고백해야겠습니다. 이젠 4년전에 골몰했던 분야가 아닌 지금의 일들이 보람되고 즐겁습니다. 머리속에 GIS로 해보고 싶고, 판을 벌려보고 싶은 계획이 너무 많고 그런 재미난 일을 함께 할 사람들도 차례차례 만나 나갈 겁니다.
매번 받기만 하다 작년에는 제가 가진 손재주로 친구를 도와줄 기회가 왔습니다. 필라델피아에서 절친하게 지내는 친구 부부가 친형 부부과 함께 세탁소를 하나 인수하기로 했습니다. 이 친구가 부동산 중개인으로부터 받은 정보는 주소와 거래조건 등 아주 기초적인 정보밖에 없었습니다. 제 친구 형제 부부는 지난 몇년 동안 세탁소에서 일하며 모은 돈을 대부분 투자해야 하는 매우 중대한 결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경험자들의 다양한 조언과 충고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결정에 대한 확신을 내리기 어려웠습니다. 저는 그 친구를 위해 각종 통계와 GIS를 이용해 인수하려는 가게의 신용조사, 인근 20개 세탁소의 매출추이와 경쟁구도, 세탁소 주변의 상가 및 주민들의 인종, 소득, 교육 수준 등이 모두 망라된 약 40페이지의 점포와 상권분석 보고서를 만들어 작은 설명회를 가졌습니다. GIS를 배운 후, 가장 가슴 뿌듯하게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었던 날이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제가 하고 싶은 사업모델로 발전되고 있습니다.
쏘렌토와 요트 세계일주
아직 저는 이렇다할 인생관이나 좌우명 이런 것이 없습니다. 그런 질문을 들으면 정말 당황스럽습니다. 다만 제가 생각하기에 멋지고 근사하다고 판단되는 여러가지 그림조각을 하나하나 모아다 맞춰 나가다 보면 언젠가 한장의 그림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막연히 믿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 조각들 중에서 재미난 이야기 하나 소개할까요? 필라델피아에 올해 쉰여덟이 되신 사업가 이야기입니다. 부산이 고향이고 스물아홉에 미국으로 건너왔습니다. 은행에서 당장 당겨다 쓸 수 있는 신용상한이 650만불이랍니다. 기아 쏘렌토를 사고싶은 친구랑 함께 만난 기아자동차 대리점 사장님 이야기입니다. 자동차 이야기 한토막으로 시작했다가 4시간 짜리 강의가 되어버렸습니다.
올해 안에 은퇴를 하겠다는 이 어른께서 준비중인 가장 중요한 인생 프로젝트는 요트로 세계 일주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주 돈 잘 벌고 잘나가는 외과의사 친구에게 '야, 우리 같이 떠나자' 꼬셨답니다. '야, 너는 영화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도 못봤냐, 걔네들 배타고 가다가 다 겨울바다에 빠져 죽었잖아' '야!! 200년 살 것도 아닌데 늙어 빠져가지고 책상에 자울자울 졸다가 심장마비로 죽을래, 아니면 나랑 요트타고 가다가 바다에서 퍼펙트 스톰 만나서 멋지게 죽을래?' '난 찬물에 빠져 죽는 거 싫어, 그냥 책상에서 앉아 있다가 죽을래' '그래 이 자식아, 넌 평생 환자 살이 째다가 책상에 머리박고 죽어라!! 이 쪼잔한 의사놈아' 그랬답니다.
미국에 이민와서 성공한 당신 연배의 한국사람들 대부분이 구두쇠에다 속이 좁아 터졌다고 결론을 내린 이 어른이 찾아간 사람은 체코에서 이민와 알람기기 사업으로 자수성가한 사람으로 오래 전부터 친하게 지내왔답니다.
박사장: 야, 더 늙어 힘없어지기 전에 나랑 요트타고 세계나 한바퀴 돌고 오자.
미스터 체코: 너, 내 마누라 봤지? 이젠 완전히 마귀할멈이야. I have to go.
박사장: 너도 내 마누라 봤지? 이젠 완전히 스모선수야. I have to go too.
그래서 내일모래 환갑인 두 사나이들이 컴퓨터, 무선통신, 디지털 카메라, 동영상 제작, GPS, 요트 운전을 배우고 준비해 일단 올해 필라델피아에서 코스타리카까지 일년 코스로 준비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답니다. 이번 길에 내전도 없고, 군대도 없고, 범죄율도 낮은 코스타리카의 한 섬을 둘러보고 연평균 18도의 온도를 유지하는 산자락에 바다가 보이는 명당자리에 별장도 계약하고 오겠답니다. 거기 물가를 고려하면 한달에 백만원이면 귀족처럼 살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이 어른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 저게 내가 하고 싶은 프로젝트야 탄성도 지르고, 동시에 극복하고 싶은 것들도 있었습니다. 8인승 요트에 겨우겨우 친구 단 한명을 태우고 가는 것이 무척 외로워 보였습니다. 농담이긴 하지만 ■■마귀할멈■■과 ■■스모선수■■로 둔갑한 아내로부터 전혀 이해받지 못하거나, 함께 하고 싶지 않은, 그래서 가족의 참여를 아예 포기한 그분들의 삶이 참 쓸쓸해 보였습니다. 또 하나, 왜 저렇게 하고 싶은 것을 평소에는 하지 못하고 은퇴를 한 후에야 시작하는 걸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트가 아니어도, 횡단 종단이 아니어도, 코스타리카 별장이 아니어도, 봉고차 한 대 가득채워 며칠 다녀오는 국내 민박 여행에서도 얼마든지 가슴 벅찬 동행의 묘미가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슬프게도 아직 저는 제 자신이 정말 무엇을 하고 싶은지, 친구 표현대로 때론 ■■피가 역류하는 것 같은 느낌, 가슴이 서늘해지는■■ 일이나 대상, 바로 ■■내마음의 넘버원■■을 찾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찾지 못하고 ■■넘버투■■나 ■■넘버쓰리■■를 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 한가지는 오늘 제가 내린 결정, 오픈메이트와 함께 비지니스 GIS를 신나게 한번 해보는 것, 그것이 제가 내린 최상의 선택이라는 점입니다.
잠시, 연구소의 마지막 짐 두 박스를 들고 어제 막뽑은 내 친구의 쏘렌토 트렁크에 옮겨두고 왔습니다. 집으로 돌아가 또 그 박스 안에 담긴 것들을 버리기도 하고, 챙기기도 해야합니다. 아마 짐이 반이상 줄 것 같습니다. 오늘이 정말 마지막이구나. 3년 반이 이렇게 마감되는구나. 그러면서 아, 얼른 한국에 가야겠다. 기다리기 힘들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픈메이트 식구 여러분, 그럼 한국에서 뵙겠습니다.